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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03월 05일 주일설교 <끌 수 없는 불꽃> | 운영자 | 2017-03-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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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4:16-22절 개역한글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 끌 수 없는 불꽃 ”
누가복음4:16~22
사도행전은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세속의 가치에 눈먼 자들에게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하고, 사탄에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주님의 은혜의 날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즉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사야61장1절-3절에 주신 인류구원의 비전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의 사명 선언인데 그의 제자들이 살았던 이야기가 사도행전입니다. 사도들의 이야기는 사도행전 28장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29장,30장...교회사를 통해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 98주년 3.1절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민조지도자34인, 조선에 온 하나님나라의 증인 프랭크 스코필드 선교사요 의사를 소개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916년 에비슨 박사로부터 초청을 받고 한국에 도착한 스코필드 박사는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의학전문학교에서 교수활동만이 아니라 영어성경반을 만들어 많은 청년남녀들을 가르쳤으며 한국의 여러 지명인사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가졌는데 그 중에서도 당시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을 받고 있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이나 3.1 운동의 33인중의 하나인 이갑성 등과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해외와 연락관계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스코필드 박사는 배후에서 갖가지 해외 정보를 국내 지도자들에게 전달해주었고 국. 내외의 연락망을 담당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는 이미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이 운동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탑골공원에서 이 역사적 사건을 두 눈으로 목격하였습니다. 그는 탑골 공원 현장에서 있었던 여러 모습들을 사진에 담았고 이를 해외에 널리 알렸습니다. 제암리 교회 방화 사건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리는 등 눈부신 활동을 감행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만세사건 이후 시위 가담자들이 석방될 수 있도록 온갖 기지와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33인중의 하나이며 3.1 운동 거사를 위해 스코필드와 밀접한 연락관계를 갖고 있었던 이갑성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습니다. “ 그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 거의 전부가 우리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를 꺼려한 것은 사실이오. 자기들 신변이 위험해지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을 거요. 한국 사람이 그러한 태도를 취한다 하더라도 크게 나무랄 수 없을 것이니까 말이오. 그런데 박사는 처음부터 달랐지. 나이도 그 때 불과 서를 하나 밖에 안된 그가 어떻게 그렇게 용감하고도 침착하게 우리편을 들 수 있었는지 모 를 일이었소. 아무튼 다른 외국인은 흉내도 못 낼 노릇이거든. 나는 늘 박사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인 것 같이 느껴왔소. 박사는 참으로 우리를 위한 천사였소. 천사야, 천사! 그의 신념과 활동은 이내 일본인들에게 눈에 가시 같은 존재로 비춰졌으며 결국은 일제의 압력으로 한국에서 추방당하였습니다. 1955년 그는 한국에 다시 돌아왔고 갖가지 사회봉사 활동을 하다가 1970년 4월12일 한국에서 사망하였고 그의 유해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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